이따금 업계인들과 마니아들의 논리가 상충하는 때가 있다. 업계인이 옳을 때도 있고 마니아가 옳을 때도 있다. 업계인들이 옳을 때는 마니아들이 갖고 있지 못한 전문자료에 근거해 판단하는 경우다. 마니아가 옳을 때는 업계인들이 내부자논리에 매몰돼 잘못된 관행과 구식 이론을 신봉하고 있을 때다. [르브바하프] 만화영화판이 기대를 모았던 이유는, 이번에야말로 만화영화판의 답답한 내부자논리를 깨뜨리는 사례가 될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이번에 나온 [르브바하프] TV만화영화판 제작사와의 서면대담을 차근차근 읽어보면 그들도 여전히 마찬가지로 그 비좁은 내부자논리에 갇혀 있음을 알게 되어 실망스럽다.
"만화영화에서도 내 그림과 똑같이 해달라 캐릭터를 추가하지 말라 세계관에 손대지 말라 등의 무리한 요청"이라는 대목은 기겁할 만하다.
저게 어떻게 무리한 요청이 되지? 헛 나온 말이라고 덮어주고 싶어도 '서면대담'이란다. 서면대담을 작성한 제작사의 직원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각색의 본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만화영화에서 그림체를 유지하는 건 기본이다. 캐릭터의 추가 또는 생략은 원작과 각색물 사이의 분량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만화와 만화영화 사이의 매체적 특성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관에 손댄다는 건 원작을 살리는 각색이 아니라 재해석을 중시하는 각색을 하겠다는 뜻인데, 지금까지 한국만화영화들의 이력으로 보아 그들의 재해석 능력을 의심하는 건 아주 당연하다. 만화가들이 무리한 요청을 한 게 아니라, 만화영화 제작자들이 심하게 무리한 요청을 해온 셈이다. 무엇보다 (주관적인 체험담일 수도 있지만) 한국만화영화계에는 저런 식으로 뜯어 고쳐야 만화영화가 되는 건 줄 아는 인식이 팽배하다. 앞뒤 맥락을 읽어보니, 제작사는 [르브바하프]의 독특한 코드를 활용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이번에도 결국 만만한 신인작가의 만만한 작품을 고른 모양이다.
"현재 한국의 만화영화 사업은 물론 캐릭터 사업도 유아와 어린이를 제외한다면 생각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 이외의 시장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으니까요"라는 대목에서는 비웃음이 나온다.
실패하는 만화영화 사업과 캐릭터 사업 기획의 본보기를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라 개발하지 않았던 것 아닌가, 라는 문제는 차치하자. 유아와 어린이만 보고 만드느라 번번이 망했던 만화영화는 둘째 치고, 흥행한 캐릭터 중 마시마로와 마린블루스부터가 청소년 이상을 소구대상으로 한다. 그냥 시장조사를 안 했으면 안 했다고 하고 마케팅을 모르면 모른다고 해라. 마니아층이 대중시장에서 발휘할 수 있는 파생영향력을 계산해야지, 그 계산을 두들겨보지도 않고 너희들은 쪽수가 적으니까 뭐라 떠들든 의미 없다고 제껴버리는 프리프로덕션이 어디 있나. 좋은 작품 들고 가서 '우리 그냥 망하게 놔두세요, 네?'라고 외치는 자들을 구경하는 것 같아 애처롭다.
부디 이번 서면대담은 답변 작성자의 개인적인 의견이고, 스튜디오카브의 의견은 다른 것이었으면 하고 덧없이 바라본다. 어쨌거나 마니아를 타당한 근거 없이 무시하는 듯한 답변 작성자의 말투는 심히 빈정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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